《삼국지·위지》에서 본 베트남
공손찬의 결의와 조조의 집착
앞선 포스트 〈손권과 동남아시아, 해상 실크로드〉에서 살펴본 것처럼, 삼국시대 오나라는 동남아시아 베트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었습니다. 현재의 베트남 북부 하노이는 오나라의 교주에 속했고, 베트남 중부 호이안 일대에 위치했던 고대국가 임읍(Champa)은 손권의 시대에 오나라에 공물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오나라의 입장에서 베트남은 멀지 않은 이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나중에 위나라의 영역이 되는 화북과 중원에서는 어땠을까요? 이 포스트에서는 《삼국지·위지》에 언급된 교주 지역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겠습니다.
🌞 일남군으로 떠나기로 결의했던 공손찬
먼저 삼국지의 “북부대공”이라고 불리는 공손찬의 이야기입니다.
중국 북방의 요서군 사람 공손찬은 젊은 시절 군의 하급 관리가 되어 태수를 모셨는데, 불행히도 태수가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고 교주에 있는 일남군으로 유배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의리의 사나이 공손찬은 몸소 태수를 유배지까지 모시고 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일남군은 당시 한나라의 남쪽 끝이었고, 태양보다도 남쪽에 있다는 의미로 ‘일남’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한나라에서 남방은 예로부터 지대가 낮고 습해서 풍토병이 심한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전한시대 사람들은 장강 이남으로 발령받는 것조차 남자의 수명이 깎인다고 꺼릴 정도였는데, 일남은 그보다 훨씬 남쪽에 있었으니 공손찬은 말 그대로 죽을 각오를 한 셈입니다. 공손찬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결연하게 조상에게 작별을 고하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유 태수가 사건에 연루되어 정위에게 소환되자 공손찬은 수레를 몰고 몸소 종복 노릇을 하며 봉양했다. 유 태수가 일남으로 유배되는 처분을 받자, 공손찬은 쌀과 고기를 차려 놓고 북망산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며 술잔을 들어 말했다.
“전에는 남의 아들이 되었으나 이제는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마땅히 일남으로 가야 합니다. 일남은 풍토병이 있어 혹시라도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우니 여기에서 선조에게 작별을 고합니다.”
두 번 절하고 비분강개하며 일어나자, 당시에 그 광경을 보며 흐느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유 태수는 도중에 사면령을 받아 돌아왔다.1《삼국지》 위지8 〈공손찬전〉
다행히도 일남군에 도착하기 전에 황제의 사면령이 내려와서 공손찬은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 교지군까지 사람을 보내 원한을 푼 조조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조조의 이야기입니다.
한국에서 “신삼국”으로 알려진 중국 드라마 《삼국》(2010)에서 조조는 “잘 들어라, 사람은 욕 먹어도 안 죽어. 내 안색과 혈기는 다 욕 먹고 만들어진 거다.”라는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실제로 원소의 부하 시절 조조의 조상을 모욕하는 격문을 썼던 진림을 용서한 미담까지 있으니, 남이 자기를 욕해도 관대하게 넘어가는 조조의 이미지는 꽤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역사책 《삼국지》의 조조는 자기 조상이 욕 먹는 것은 참아도 자기가 욕 먹는 것은 참지 못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진류군의 명사 변양입니다. 조조가 연주목이 되었을 때 조조를 비판한 변양은 결국 조조에게 처형되고 가족까지 몰살당했습니다.
이 변양 살해 사건은 조조에게 원한을 산 사람들을 벌벌 떨게 했습니다. 일찍이 조조가 벼슬 없이 고향 패국에서 지내던 시절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원충과 환소는 조조의 분노를 피해 가족을 이끌고 교주까지 피신했지만, 조조는 포기하지 않고 교지군 태수 사섭을 시켜 그들을 멸족시켰습니다.
앞서 원충이 패국 상 벼슬을 지내던 시절 태조를 법에 따라 처벌하려고 한 적이 있었고, 패국 사람 환소도 태조를 경시했다. 태조가 연주에 있을 때 진류 사람 변양이 태조를 상당히 침범하는 논의를 펼치자 태조는 변양을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했다. 원충과 환소는 모두 교주로 피난을 갔다. 태조는 태수 사섭에게 사자를 보내 그들을 모두 멸족시키게 했다. 환소가 나와서 자수하고 마당에서 절을 하며 사죄했지만 태조는 말했다.
“무릎을 꿇는다고 죽음을 면할 줄 아느냐!”
결국 그를 죽였다.2《삼국지》 위지1 〈무제기〉 주석 《조만전》
《조만전》에 실린 이 일화의 사실 여부를 의심하더라도, 이런 일화가 있다는 것 자체가 당시의 중원 사람들에게 교지가 얼마나 먼 곳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렇게 《삼국지·위지》에 언급된 교주는 대체로 낯설고 무서운 곳이었습니다. 북방 사람 공손찬은 교주로 유배되는 것을 살아서 돌아오기 힘든 형벌로 여겼고, 중원에서도 교주는 조조의 잔인함을 피해 가장 멀리 도망칠 수 있는 세상의 끝과 같았습니다. 교주를 넘어 인도차이나 반도로 떠나고 로마로 연결되는 항로까지 수집했던 오나라 사람들과는 천양지차였던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