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와 사죄
VP以謝NP
목차
어떤 사람을 죽임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사죄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한나라 사람들은 가능하다고 믿었던 것 같습니다.
한문에서 ‘VP以謝NP’라고 하면 VP(동사구)라는 행위로써 NP(명사구)에게 사죄한다는 의미입니다. 이 패턴은 전한시대와 후한시대를 포함하는 여러 역사책에서 꾸준하게 나타났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표현의 용례가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요? 이 글에서는 전4사에서 ‘以謝’를 포함한 문장을 검색하여 사죄의 수단으로 사람을 살상하는 것을 뽑아 보았고, 살상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구와 사죄를 받을 명사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에 주목합니다.
《사기》
- 죽이다[殺]: 2건
- 베다[斬]: 2건
- 벌하다[誅]: 2건
동사로 사용된 ‘죽이다’, ‘베다’, ‘벌하다’는 각각 살해 자체, 살해의 방법, 살해의 절차로 볼 수 있습니다. 세 가지가 두 번씩 골고루 나옵니다.
(이웃) 나라에 사죄하기
우선 《사기》에서는 시대에 따라 사죄의 대상이 변하는 것을 주목할 만합니다. 먼저, 춘추전국시대부터 서한 초까지는 노, 오 등 이웃 제후국에게 사과하는 외교적 목적이 있었습니다.
제 양공은 팽생을 죽여[殺] 노에 사죄했다.
《사기》 〈제태공세가〉
조를 베어[斬] 오에 사죄해야만 합니다.
《사기》 〈원앙조조열전〉
아래의 예문은 동월 사람들이 한나라의 천자에게 사죄하고자 하는 것이므로 위의 사례와 비슷합니다.
왕을 죽여서[殺] 천자에게 사죄하는 것이다.
《사기》 〈동월열전〉
천하 사람들에게 사죄하기
다음으로 나오는 세 예문은 모두 서한 무제 때입니다. 이제 제후국의 세력은 약해졌고, 사죄 상대는 천하로 확장됩니다.
지금 회를 벌하지[誅] 않으면 천하에 사죄할 수 없습니다.
《사기》 〈한장유열전〉
주보언을 벌하지[誅] 않으면 천하에 사죄할 수 없습니다.
《사기》 〈평진후주보열전〉
승상과 어사를 베어[斬] 천하에 사죄해야만 합니다.
《사기》 〈회남형산열전〉
《한서》
- 죽이다[殺]: 2건
- 베다[斬]: 4건
- 벌하다[誅]: 3건
- 머리를 얻다[得其頭]: 1건
- 엎드려 드러내어 륙을 당하다[伏顯戮]: 1건
《한서》의 경우 위에서 소개한 《사기》의 예문이 그대로 나오고, 추가로 다섯 건이 더 나옵니다. 동사구로 새로 나온 ‘머리를 얻다’와 ‘엎드러 드러내어 륙을 당하다’ 같은 표현은 살해의 방법과 절차를 한층 더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조조의 죽음
《한서》에서 눈에 띄는 점은 조조가 네 번이나 죽는다는 것입니다. 오·초 7국의 난을 일으킨 제후국의 요구에 따라 어사대부 조조를 죽인 사건이 조조 자신의 전기 이외에도 세 군데에 더 나와서, 《사기》에서보다 더 중요한 사건으로 다루어지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사대부 조조를 베어[斬] 일곱 제후국에 사죄하였다.
《한서》 〈경제기〉
조를 베어[斬] 제후들에게 사죄했습니다.
《한서》 〈가추매노전〉
지금 한에서는 친히 삼공을 벌하여[誅] 이전의 잘못을 사죄했습니다.
《한서》 〈가추매노전〉
구체적인 살해 묘사
다음으로는 《사기》 이후 서한 후반에 해당하는 새로운 내용입니다. 앞에서 나온 죽이다·베다·벌하다 세 가지에 비해 살해 방법의 묘사가 더 상세해졌습니다. 수사적인 효과를 노린 것 같습니다.
멀리 도망쳤더라도 그들의 머리를 얻어 [得其頭] 백성에게 사죄해야 합니다.
《한서》 〈갑제갈유정손무장하전〉
잘못은 신 봉에게 있으니 엎드려 사람들 앞에서 륙을 당해 [伏顯戮] 천하에 사죄해야 합니다.
《한서》 〈원후전〉
한편 사과 상대로 백성이 등장한 것도 특기할 만합니다.
《후한서》
앞서 《한서》에서 《사기》에 없던 새로운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했는데, 《후한서》까지 오면 더욱 다양해집니다. 사람을 살상하는 행위가 포함된 以謝가 일곱 번 나오는데 서로 겹치는 것이 한 개도 없습니다.
노골적인 살해 묘사
아래의 네 개 예문에서는 죽고 죽이는 방법이 《한서》에서보다도 상세해졌습니다. 단순히 죽인다고만 하던 《사기》에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묘사입니다.
수에게 북쪽을 향해 목을 자르도록[北向刎首] 하여 큰 은혜에 사죄해야 합니다.
《후한서》 〈이왕등래열전〉
엎드려 극형을 받아[伏大辟] 천하에 사죄해야 한다.
《후한서》 〈진왕열전〉
간악한 도적을 도성의 시장에서[於都市] 찢어[磔裂] 천지에 사죄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후한서》 〈동탁열전〉
십상시를 베고[斬] 남교에 머리를 걸어[縣頭] 백성에게 사죄하는 것이 옳습니다.
《후한서》 〈환자열전〉
개인에게 사죄하기
또한 《후한서》에서는 죽음으로 사죄하는 상대로 개인이 추가되었습니다.
마침내 처와 봉의 머리를 깎아[髡] [태후에게] 사죄하였다.
《후한서》 〈등구열전〉
자살하여[自殺] 기에게 사죄하였다.
《후한서》 〈조기왕패제준열전〉
심지어 귀신에게까지 사죄합니다.
고발한 자를 륙하여[戮] 원혼에게 사죄하는 것이 옳습니다.
《후한서》 〈순리열전〉
《삼국지》
《삼국지》의 경우 《후한서》와 비슷합니다. 기본형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이다·베다·벌하다 세 가지 이외에도 다양한 표현이 늘어납니다.
에스컬레이션
‘시장과 조정에서 수레로 찢어’, ‘허리와 머리를 분리하여’, ‘흰 기에 머리를 건다 해도’ 같은 표현을 보면 감정이 격해질수록 구체적으로 살해 방법을 묘사하는 것 같습니다.
너를 시장과 조정에서[於市朝] 수레로 찢어[車裂] 천하에 사죄하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
《삼국지》 〈동탁전〉 주석
지금 곧바로 그를 찔러 죽여서[刺殺] 백성에게 사죄하는 것이다.
《삼국지》 〈순유전〉
가충을 벌하여[誅] 천하에 사죄하십시오.
《삼국지》 〈진태전〉 주석
가충을 베는[斬] 것이 있어야 천하에 조금이나마 사죄할 수 있습니다.
《삼국지》 〈진태전〉 주석
태조는 그를 죽여[殺] 유에게 사죄했다.
《삼국지》 〈고유전〉
속을 륙하여[戮] 사람들[衆]에게 사죄했다.
《삼국지》 〈제갈량전〉
허리와 머리를 분리하여[腰首分離] 백성에게 사죄하는 것이 옳습니다.
《삼국지》 〈손호전〉
흰 기에 머리를 건다 해도[梟首素旗] 원혼에게 사죄하기에는 부족합니다.
《삼국지》 〈손호전〉 주석
죽는[死] 것이 아니면 사죄할 수 없다.
《삼국지》 〈능통전〉
일족까지 벌하여[誅夷] 백성에게 사죄했다.
《삼국지》 〈육개전〉
(2021-02-07 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