彘(돼지 체)는 과연 인간돼지 때문에 사라졌나?
고대중국어 豕, 彘, 豬의 쓰임 변화
彘(돼지 체)에 관한 인터넷 커뮤니티의 “정설”
2026년 5월 현재, 한국어 웹에서 인간돼지[人彘] 사건 이야기가 나오면 으레 “이 사건 때문에 돼지 체(彘)라는 한자가 사라졌다”는 말이 따라붙습니다. 바로 어제 트위터에 게시된 만화에서 촉발된 여러 게시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 ZZUM (@eenmzj) May 21, 2026
이 만화를 인용한 한 트윗에 따르면, 인간돼지 사건 전까지 중국에서 돼지를 가리키는 한자로 彘(체)가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해당 트윗은 이 포스트를 작성하는 시점에서 960회 넘게 리트윗되었고 1,600개가 넘는 마음을 받았습니다.
원문의 척부인 사건때 사용된 단어가 인체(人彘)인데.
— 공성맨 (@BIG_GONGSUNGMAN) May 21, 2026
저 체(彘)자가 저 당시까지만 해도 '돼지'라는 생물을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다가
저 사건 이후로 원래는 새끼 돼지를 뜻하던 돈(豚)이나, 암퇘지만을 뜻하던 저(豬)로 대체되어서 옥편 구석으로 밀려난 벽자가 되었답니다... https://t.co/D71Sm58W2R
또한, 이 만화를 퍼 간 루리웹 게시물 〈자기 아들을 충격먹어 죽게 만든 일화〉의 댓글을 살펴보면, 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彘(체)가 豚(돈), 豬(저)와 함께 쓰이다가 인간돼지 사건 때문에 한나라 때부터 거의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댓글은 비추천 없이 12회의 추천만 받았습니다.
이 “정설”의 뿌리에 관해서는 직전 포스트 〈彘(돼지 체)와 인간돼지 괴담〉에서 이미 다루었습니다. 나무위키에서 〈척부인〉, 〈彘〉 등의 문서에서 신빙성 없는 썰로 시작했고, 이후 여러 편집자들이 근거도 없이 “병용되어 활발히 사용”, “사용 빈도가 급감” 등 마치 학술적으로 근거가 있는 듯한 말투로 윤색해 주면서 그럴듯한 “정설”의 모양을 갖추어 루리웹, 에펨코리아 등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나무위키와 남초커뮤니티에서 누구도 언급하지 않은 출처를 애써 탐색하는 호의를 베풀어 주자면 2019년 1월에 《중앙SUNDAY》에 실린 베이징 특파원 신경진 기자의 칼럼에서 원형의 일부를 찾을 수 있지만, 이 칼럼 또한 문헌 증거가 없는 민간어원설일 뿐입니다.
彘(돼지 체)의 쓰임 변화
무엇을 밝힐 것인가?
정작 이 “정설” 자체는 반박할 가치가 없습니다. 애초에 彘(체)라는 글자가 인간돼지 사건으로 인해 사라졌다고 주장한 쪽에 인과관계를 입증할 책임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워낙 “정설”로 퍼져서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고, 결정적으로 현상의 원인을 설명하기 앞서 현상 자체를 서술하는 단계에서 잘못되어 있으므로 정정이 필요합니다.
앞서 인용한 트윗의 경우, 크게 두 개의 명제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저 체(彘)자가 저 당시까지만 해도 돼지라는 생물을 표현하는데 가장 많이 사용되다가
- 저 사건 이후로 원래는 새끼 돼지를 뜻하던 돈(豚)이나, 암퇘지만을 뜻하던 저(豬)로 대체되어서 옥편 구석으로 밀려난 벽자가 되었답니다…
사실 명제라고 치기에는 “당시까지”와 “이후”가 매우 모호합니다. 당시까지라면 언제부터 彘가 돼지라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다는 것인지? 이후라면 언제부터 彘가 밀려났다는 것인지? 게다가 豬(저)가 암퇘지만을 뜻했다는 것도 금시초문으로, 적어도 《설문해자》, 《이아》, 《석명》 등 후한시대 자전에서는 관련된 풀이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정설”을 최대한 정비해 주자면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 전제(현상 기술): 고대 중국에서 彘라는 글자가 돼지를 가리키는 뜻으로 활발히 쓰였다가 인간돼지 사건 이후로 거의 쓰이지 않게 되었다.
- 주장(원인 분석): 彘가 사라진 까닭은 사람들이 인간돼지 사건의 잔인함을 꺼렸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일단 “정설”이 전제하는 현상을 검증하도록 하겠습니다. 주된 레퍼런스는 아래의 두 학술논문입니다.
- 王彤伟. 〈“豕、彘、猪”的历时演变〉. 《四川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2010(1), 74–79.
- 胡琳·张显成. 〈“豕、彘、猪”的历史演替:基于出土简帛新材料〉. 《求索》, 2015(2), 164–168.
두 논문에서는 고대 중국에서 돼지를 통칭하는 용어가 어떻게 변해 왔는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특히 豕(시), 彘(체), 豬(저) 세 글자의 쓰임이 어떻게 경합하고 교체되었는지를 실제 자료에 근거하여 고찰했으므로 참고하기에 적절합니다.
彘(체) vs. 豕(시)
춘추시대까지 돼지의 통칭은 彘(체)가 아니라 豕(시)였다
“정설”을 따르자면 인간돼지 사건 이전까지 한자 彘(체)가 돼지를 가리키는 의미로 시종일관 활발하게 사용되었을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전세문헌 텍스트를 살펴보면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王彤伟(2010; 75)에서 지적했듯이 《시경》, 《서경》, 《역경》, 《논어》 등 이른 시기의 고전에서 돼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은 豕(시)였고, 彘(체)와 豬(저)는 한 번도 출현하지 않은 것입니다.
彘(체)는 전국시대에 들어서야 돼지를 가리켰다
彘(체)가 돼지를 가리키게 된 것은 인간돼지 사건의 시점에서 의외로 최근의 일입니다. 글자 자체는 갑골문에 존재했지만, 갑골문의 시대에는 제사나 부족의 명칭과 같은 고유명사로만 쓰였습니다(王彤伟 2010; 74). 이후 서주시대와 춘추시대를 지나서 전국시대가 되어야 《맹자》와 《장자》에서 동물 돼지의 의미로 쓰인 것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王彤伟 2010; 75).
그렇다고 해서 彘(체)가 豕(시)를 대체해서 곧바로 돼지의 새로운 표현으로 자리잡은 것은 아닙니다. 전국시대 말 《순자》, 《한비자》, 《여씨춘추》로 가면 彘(체)의 사용 빈도가 늘어나기는 하지만, 豕(시)에 비해서는 쓰임이 여전히 제한적이었던 것입니다(王彤伟 2010; 75). 彘(체)는 대부분 집돼지에 한정되었고, 문법적으로 “돼지고기”와 같은 합성어를 이루지 못했습니다. 즉, “정설”의 전제와 달리 彘(체)는 진나라의 통일 직전 여불위의 시대까지도 활발하게 쓰였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彘(체)는 한나라가 되어서야 豕(시)를 대체했다
彘(체)의 용법 제한은 《회남자》, 《사기》, 《한서》 등 전한시대 문헌에서 풀립니다. 특히 주목할 점은, 이전 시기에 돼지를 가리키는 데 豕(시)를 썼던 문장을 인용할 때 彘(체)로 수정한 사례가 여러 차례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王彤伟 2010; 75-76). 예를 들어 전국시대 《순자》는 개돼지를 “狗豕(구시)”로 표현했지만, 전한시대 《회남자》에서 이 문장을 인용할 때는 “狗彘(구체)”로 바꾸어 썼습니다.
참고로 《회남자》의 대표 저자인 회남왕 유안은 인간돼지 사건 이후의 인물입니다. 만약 “정설”에 따라 彘(체)가 인간돼지 사건 이후로 기피되었다면, 사건 뒤에 나온 《회남자》가 《순자》에 없던 彘(체)를 굳이 새로 끌어다 쓸 까닭이 없습니다. 설사 《순자》가 彘(체)를 썼더라도 《회남자》에서는 다른 글자로 고쳐 쓰는 편이 자연스러웠을 텐데, 실상은 정반대였던 것입니다.
소결
王彤伟(2010)의 연구를 토대로 彘(체)의 용법을 豕(시)와 비교해 본 결과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 彘(체)는 한나라 이전까지만 해도 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제한적으로만 사용되었다.
- 오히려 인간돼지 사건 이후에 彘(체)는 쓰임이 확대되기도 했다.
즉, 彘(체)가 인간돼지 사건 때문에 사장되었다는 “정설”은 전세문헌 자료에 전혀 들어맞지 않습니다.
彘(체) vs. 豬(저)
인간돼지 사건 이후 彘(체)가 豬(저)로 대체되었는가?
어쨌든 한나라 이후의 텍스트에서 彘(체)라는 글자가 흔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豬(저)가 돼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로 자리잡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여기에서 彘(체)가 인간돼지 사건 때문에 豬(저)에게 밀려났다고 볼 여지는 없을까요? 王彤伟(2010)의 전세문헌 연구만 본다면 豬(저)가 후발주자로 등장해서 彘(체)를 밀어낸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 나온 胡琳·张显成(2015)의 연구에서 죽간 등의 출토문헌까지 검토한 결과를 참고하면 이것 또한 실상과 다릅니다.
彘(체)는 통일 진나라의 표준어로 강제되었다
豬(저)는 이미 《수호지진간》 등 전국시대 진나라 시기의 자료에도 나타났습니다. 더욱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야진간》의 “毋敢曰豬曰彘(무감왈저왈체)”라는 구절입니다. 胡琳·张显成(2015; 168)에서는 이 구절을 “감히 豬(저)라고 하지 말고 彘(체)라고 하라”라고 해석했습니다. 진나라가 통일 후 언어를 통일하면서 豬(저)를 금지하고 彘(체)를 강제한 것입니다. 豬(저)를 굳이 금지했다는 것은 이 글자가 진나라 통일 당시 중국에서 그만큼 널리 쓰이고 있었다는 단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잘 쓰이지 않는 말이면 애써 공문서로 금지할 필요까지 없었을 것입니다.
豬(저)는 전한시대 구어로 통용되었다
豬(저)가 진나라 통일 당시 널리 쓰이고 있었다면, 서면어에서 금지되었다고 하더라도 구어에서는 보존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일시의 언어 정책으로 인해 彘(체)가 보급되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일상에서 쓰는 말에는 豬(저)가 남아 있었고, 이것이 더 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전한시대 말 양웅의 《방언》에 단서가 있습니다. 《방언》은 양웅이 당시의 지역방언을 조사해서 편찬한 책입니다. 여기에서 돼지를 대표하는 말은 彘(체)가 아니라 豬(저)였습니다.
소결
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彘(체)는 진나라 통일 시기에 이미 豬(저)와 경쟁하고 있었고, 국가의 정책에 힘입어 서면어에서 일시적인 승리를 거두는 듯했다가 구어에서 豬(저)를 이기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약
지금까지 논의한 것을 세 단계로 요약해 봅시다.
- 고대 중국에서 춘추시대까지 돼지 일반을 가리키는 말은 彘(체)가 아니라 豕(시)였습니다.
- 전국시대 새로운 말로 彘(체)와 豬(저)가 경쟁하다가 彘(체)가 통일 진나라의 지원으로 서면어 표준어의 지위를 획득했습니다.
- 한나라에서 구어로 살아남은 것은 彘(체)가 아닌 豬(저)였습니다.
나무위키발 커뮤니티 “정설”의 전제는 1단계와 2단계에서 이미 무너집니다. 여기서 굳이 3단계만 잡고 彘(체)의 패배에 인간돼지의 영향도 있지 않겠느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까지 가면 믿음의 영역이니까 아는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참고문헌
- 王彤伟. 〈“豕、彘、猪”的历时演变〉. 《四川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2010(1), 74–79.
- 胡琳·张显成. 〈“豕、彘、猪”的历史演替:基于出土简帛新材料〉. 《求索》, 2015(2), 164–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