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이야기를 합니다.

彘(돼지 체)와 인간돼지 괴담

彘(돼지 체)와 인간돼지 괴담

나무위키에서 나온 정체불명의 썰

주아
주아 《한서》 파는 사람

한자 彘는 ‘체’라고 읽고, 돼지를 뜻하는 말입니다. 가장 유명한 용례는 《사기》 〈여태후본기〉에 나오는 인체, “인간돼지”입니다. “인간돼지”란 한나라 고제의 황후 여씨가 후궁 척 부인의 신체를 잔인하게 훼손한 사건으로, 이 블로그에서도 〈인간돼지 사건을 서술하는 두 가지 방법〉이라는 포스트로 상세히 다룬 적이 있습니다.

한국어 웹에서 이 한자를 찾으면 나무위키 〈〉 문서가 가장 먼저 나옵니다. 이 문서에서는 ‘돼지 체’ 彘 한자가 널리 쓰이지 않는 까닭으로 여 태후의 인간돼지 사건을 언급합니다. 2023-09-20 08:42:46에 편집된 r6 판부터 이 내용이 들어가 있습니다.

원래 해당 한자는 고대에 돼지 돈, 돼지 저와 달리 활발하게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고한이 들어서면서 한태조의 첩이었던 척부인이 여치에 의해 인간돼지 형벌을 받게되며, 민간에서 해당 한자를 꺼리게 되어 사문화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나무위키 - 彘 (r6 판)

“고한”, “한태조” 등 잘 쓰이지 않는 용어도 수상하거니와, 주장의 출처도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r6 판 이래로 지금까지 3년 가까운 시간 동안 〈彘〉 문서가 여러 차례 수정되어 왔지만, 이 주장은 삭제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살이 더 붙었습니다.

원래 해당 한자는 고대에 豚(돼지 돈), 豬(돼지 저), 豕, 豭(수퇘지 가) 등과 병용되어 활발히 사용되었으나, 한나라 왕조가 들어서면서 사용 빈도가 급감한다. 한태조의 첩이었던 척부인이 여치에 의해 인간돼지(人彘, 인체) 형벌을 받아 끔찍한 최후를 맞이한 것이 민간에 알려져 해당 한자의 사용을 꺼리게 되어 사문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나무위키 - 彘 (r19 판)

〈彘〉 r19 판에서는 “병용되어 활발히 사용”, “사용 빈도가 급감한다”로 더욱 그럴듯한 표현을 쓰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주장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보니, 나무위키에서 이 주장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아마도 〈척부인〉 문서의 r19 판인 듯합니다. 2021-08-30 22:41:36에 처음 삽입된 문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인들이 돼지 체(彘)라는 글자를 꺼려했다고 하니 그 잔인함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가능하다.

나무위키 - 척부인 (r19 판)

이 썰에는 출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썰이 나온 〈척부인〉 문서 r19 판의 편집 이력을 보면, 출처가 없다는 문제는 사소해 보일 지경입니다.

나무위키 척부인 (비교) r18 vs r19

이 r19 판에서는 척 부인이 “태형을 받고” “우선 죄수들에게 던져 강간을 당하게 한 후” 인간돼지로 만들어졌다고 서술해 놓았습니다. 전혀 근거 없는 내용입니다. 이런 내용들은 이후의 편집 과정에서 차츰 삭제되었습니다. 하지만 중국인들이 彘라는 글자를 꺼렸다는 썰에 대해서는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거나 수정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썰은 적극적으로 확대되었습니다. 2026년 5월 22일 시점의 최신판을 읽어봅시다.

당시에는 돼지를 표기한 한자로 돼지 체(彘)를 사용한 비율이 지금보다는 높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 인체 사건으로 인해 돼지 체(彘)보다는 돼지 돈(豚)이나 돼지 저(豬)의 비율이 늘어나 이후 체(彘)는 90년 후의 순체의 이름, 200여 년 후의 고구려 동천왕의 아명에서나 겨우 보이고, 지금은 옥편 귀퉁이에서나 볼 수 있는 벽자가 되었다.

나무위키 - 척부인 (r1748 판)

처음에 척 부인이 감옥에서 윤간을 당했다는 터무니없는 괴담과 같은 수준으로 등장했던 썰이, 꽤나 신빙성 있어 보이는 문장으로 윤색되어 한국어 웹에 전파된 것입니다. 실제로 구글에서 검색해 보면 루리웹, 에펨코리아 등 여러 남초커뮤니티에서 이 썰을 의심 없이 퍼 나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람돼지 인체人彘가 된 척부인 얘기로 바뀐 한자 이야기, 너무 잔혹해서 단어까지 없애버린 중국 고문 - 미스터리/공포

이 썰이 성립하려면, 일단 한나라 초 인간돼지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彘라는 한자가 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고 있었어야 합니다. 그래야 줄어들든지 사라지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무위키의 숱한 편집자들 중에서, 전세문헌이든 출토문헌이든 인간돼지 사건 이전에 彘가 얼마나 등장했는지를 실제로 세어보거나 찾아본 사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는 돼지를 표기한 한자로 돼지 체(彘)를 사용한 비율이 지금보다는 높았을 것으로 사료된다”는 정보량 없는 문장뿐입니다.

인간돼지 사건은 분명히 끔찍합니다. 彘라는 한자가 이 사건 때문에 꺼려졌다는 민간어원설이 어디선가 생겼을 수도 있고, 그로 인해 인간돼지 사건에 대한 민간의 인식을 엿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썰이 彘의 분포 변화에 대한 유의미한 설명이 되지는 않습니다.

참고로 전국시대와 진한시대에 돼지를 가리키는 한자로 豕(시), 彘(체), 猪(저) 세 글자의 쓰임이 어떻게 경합하고 교체되었는지에 대한 연구가 이미 존재합니다. 재미있는 내용이므로 다음 포스트 〈彘(돼지 체)는 과연 인간돼지 때문에 사라졌나?〉에서 상세히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 王彤伟. 〈“豕、彘、猪”的历时演变〉. 《四川大学学报(哲学社会科学版)》, 2010(1), 74–79.
  • 胡琳·张显成. 〈“豕、彘、猪”的历史演替:基于出土简帛新材料〉. 《求索》, 2015(2), 164–168.

썰의 출처에 관한 덧붙임(2026-05-23 04:27)

이 포스트를 업로드한 뒤, 2019년 1월에 《중앙SUNDAY》에 실린 베이징 특파원 신경진 기자의 칼럼에서 중국인이 인간돼지 사건으로 인해 돼지 체(彘) 사용을 꺼렸다고 언급한 것을 찾았습니다.

체(彘)는 큰 돼지다. 저와 돈을 섞어 쓰는 중국에 유독 체는 쓰지 않는다. 한(漢)을 세운 유방(劉邦)의 부인 여후(呂后)와 척부인(戚夫人)의 악연 때문이다. 척부인이 아들을 후계자로 세우려 한 데 앙심을 품은 여후는 유방이 죽자 척부인을 ‘인체(人彘)’로 만들었다. 산 채로 팔다리를 자르고 귀에 청동을 붓고 혀를 잘랐다. 말 그대로 ‘사람 돼지’를 만든 잔혹한 형벌이다. 이후 중국인은 돼지 체(彘) 사용을 꺼렸다.

신경진. 〈[漢字, 세상을 말하다] 肥猪拱門<비저공문>〉. 《중앙SUNDAY》 617호 29면. 2019.01.05 00:20 입력. [기사 링크]

이 칼럼에서도 문헌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습니다. 애초에 이 칼럼은 그냥 돼지해를 맞아 돼지를 가리키는 한자와 관련된 잡담으로 민간어원설을 소개한 것뿐입니다. 나무위키에 이런 유형의 썰을 출처 없이 가져다 쓴 자는 정보의 층위를 구분하지 못했고, 이후 나무위키에서 해당 부분을 편집한 자들은 민간어원설을 그럴듯한 사실처럼 윤색하는 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셈입니다. 이들의 윤색으로 인해, 아래의 트윗과 같이 인간돼지 사건 이전 ‘彘’가 돼지를 가리키는 말로 가장 많이 쓰였다는 허위 정보가 거침없이 통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

공교롭게도, 《중앙SUNDAY》 해당 칼럼 말미에서 마오쩌둥의 어록을 인용하며 꼬집은 행태가 나무위키 편집자들에게 꼭 들어맞습니다. 😏

마오쩌둥(毛澤東) 어록에도 돼지가 등장한다. 1945년 4월 옌안(延安) 7차 중국 공산당 대회에서다. 마오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며 “훔치지 말고, 꾸미지 말고, 허풍떨지 말라(不偸·不裝·不吹)”고 강조했다. 특히 거짓 꾸밈을 경계해 “돼지코에 파 뿌리를 꽂고 코끼리인 척하는(猪鼻子里插葱 裝象)” 행태를 금했다.

신경진. 〈[漢字, 세상을 말하다] 肥猪拱門<비저공문>〉. 《중앙SUNDAY》 617호 29면. 2019.01.05 00:20 입력. [기사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