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돼지 사건을 서술하는 두 가지 방법
《사기》 〈여태후본기〉와 《한서》 〈외척전〉의 비교
목차
이 포스트는 2017년에 작성했던 글을 수정하고 보충한 것입니다.
🕵️ 인간돼지 사건
배경
한나라의 첫 번째 황제인 고제 유방은 한왕 시절 정실부인 여씨의 아들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태자의 지위는 굳건하지 않았습니다. 유방이 가장 사랑하는 첩인 척 부인이 밤낮으로 울면서 자기가 낳은 유여의를 후계자로 삼아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태자가 유약하다고 못마땅해하던 유방은, 자기를 더 닮아 보이는 유여의로 태자를 바꾸고 싶어했습니다. 하지만 주창, 숙손통, 장량 등 여러 대신이 각고로 노력한 덕에 태자는 자리를 지켰고, 유방이 죽은 뒤 새로운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 황제가 바로 혜제입니다. 황태후가 된 여씨는 자기의 자리를 여러 차례 위협한 척 부인과 유여의 모자를 용서하지 못하고 해치고자 했습니다.
전개와 결말
- 유방이 죽은 뒤 척 부인은 원래 조나라 왕으로 봉해진 아들을 따라가서 조나라 태후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여 태후는 척 부인이 궁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영항이라는 감옥에 감금했습니다.
- 여 태후는 조나라에 있는 유여의를 해치기 위해 수도 장안으로 불러왔습니다.
- 혜제는 여 태후의 분노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동생 유여의를 몸소 보호했습니다.
- 여 태후는 유여의가 늦잠을 자서 혼자 남은 틈을 타 유여의를 독살했습니다.
- 여 태후는 영항에 감금되어 있던 척 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들고 변소에서 살게 합니다.
- 혜제는 여 태후가 보여준 ‘인간돼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아 폐인이 됩니다.
이 과정은 중국 정사 《사기》와 《한서》에 모두 나옵니다. 둘 중에서 원본을 따지자면, 물론 사마천이 쓴 《사기》가 원작입니다. 하지만 반고가 쓴 《한서》라고 해서 《사기》를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고, 《사기》에 없는 내용을 보충해서 넣기도 했습니다. 이 글에서는 ‘인간돼지’ 사건을 다루는 《사기》와 《한서》의 서술 방법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그 차이가 독자의 경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 《사기》의 서술
〈여태후본기〉 본문 번역
인간돼지[人彘] 사건이 처음 서술된 곳은 《사기》 〈여태후본기〉입니다. 우선 해당 내용의 본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봅시다. 분홍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한서》에 없고 《사기》에만 나오는 문장입니다.
여후는 척 부인과 그의 아들 조왕에게 가장 큰 원한을 품어, 영항에 척 부인을 가두게 하고 조왕을 소환했다. 사자들이 세 차례 돌아가고 조나라 상 건평후 주창은 사자에게 말했다.
“고제께서 신에게 조왕을 맡기셨고 조왕은 나이가 어립니다. 듣자하니 태후께서 척 부인을 원망하여 조왕을 부른 뒤 함께 죽이고자 하신다는데, 신은 감히 왕을 보낼 수 없습니다. 또 왕은 병이 들어 조서를 받들 수 없습니다.”
여후는 격노하여 사람을 보내 조나라 상을 소환했다. 조나라 상이 장안에 이르자, 다시 사람을 보내 조왕을 소환했다. 왕이 왔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을 때였다. 인자한 효혜제는 태후의 분노를 알아서, 몸소 조왕을 패상에서 맞이하고 함께 궁으로 들어와 자기 옆에 끼고 숙식을 함께했다. 태후는 그를 죽이고 싶었지만 틈을 얻지 못했다.
효혜제 원년 12월, 황제는 새벽에 활을 쏘러 나갔다. 조왕은 어려서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태후는 그가 혼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을 시켜 독주를 들고 가 그에게 마시게 했다. 동이 틀 무렵 효혜제가 돌아오자 조왕은 이미 죽어 있었다.
이로 인해 회양왕 유우의 봉국을 옮겨 조왕으로 삼았다.
여름, 역후의 부친(여 태후의 큰오빠)에게 영무라는 시호를 추서했다.
태후는 마침내 척 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지지고, 말을 못 하게 만드는 약을 먹이고 변소에서 살게 하며 ‘인간돼지’라고 이름붙였다.
며칠을 보내고 효혜제를 불러 인간돼지를 보여주었다. 이를 본 효혜제는 무슨 일인지 묻고 그것이 척 부인임을 알게 되자 크게 통곡하며 이로 인해 병이 들어 해가 다 가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효혜제는 사람을 보내어 태후에게 청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신은 태후의 아들이 되어 끝끝내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효혜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날마다 술을 마시고 음란과 쾌락을 일삼으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병이 들었다.
《사기》 〈여태후본기〉
읽다 보면 중간쯤에 인간돼지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 보이는 문장이 두 개 보입니다. ‘이로 인해 회양왕 유우의 봉국을 옮겨 조왕으로 삼았다.’와 ‘여름, 역후의 부친(여 태후의 큰오빠)에게 영무라는 시호를 추서했다.’가 그것입니다. 이 두 문장은 도대체 왜 들어갔을까요? 바로 〈여태후본기〉이기 때문입니다.
통치자의 연대기
〈여태후본기〉는 ‘여 태후의 본기’라는 뜻입니다. 본기란 통치자의 연대기입니다. 본기에서는 몇 년 봄 정월 무엇을 했고 2월 무엇을 했고 하는 통치행위들이 시간순으로 나열됩니다. 그러므로 겨울에 조왕을 독살한 사건과 다음 여름에 척 부인을 인간돼지로 만든 사건 사이에 여 태후가 통치자로서 시행한 정책이 언급된 것입니다. 즉, 이 사건들은 마치 정상적인 통치행위인 것처럼 새로운 조왕의 책봉, 영무후의 시호 추서 등의 조치와 나란히 나열되었습니다. 이 건조한 서술이 오히려 독자에게 더 큰 충격을 전하는 듯합니다.
📑 《한서》의 서술
〈외척전〉 본문 번역
한편, 《한서》에서는 이 사건을 〈여태후본기〉에 상응하는 〈고후기〉가 아니라 〈외척전〉에 실었습니다. 사건의 전말은 《사기》와 대동소이하지만, 세부적으로 다른 내용도 있습니다. 아래 번역에서 하늘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사기》에 없고 《한서》에만 나오는 문장입니다.
고조가 붕어하고 혜제가 즉위하고 여후는 황태후가 되어 영항에 척 부인을 가두게 하고 머리를 깎고 칼을 채우고 죄수복을 입혀 절구질을 하는 노역을 시켰다. 척 부인은 절구질을 하며 노래를 불렀다.
“아들은 왕이 되고, 어미는 포로 되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절구질하고, 일상으로 사형수와 함께한다네. 삼천리 밖 먼 곳으로 헤어졌으니, 어느 누가 네게 가서 소식 전할꼬?”
태후는 그 노래를 듣고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네 아들에게 기대 볼 요량이냐?”
그래서 조왕을 소환해서 죽이고자 했다. 사자들이 세 차례 돌아갔지만 조나라 상 주창은 왕을 보내지 않았다. 태후가 조나라 상을 소환하여 조나라 상이 장안에 이르렀다. 다시 사람을 보내 조왕을 소환하자 왕이 왔다. 인자한 혜제는 태후의 분노를 알아서, 몸소 조왕을 패상에서 맞이하고 궁으로 들어와 옆에 끼고 숙식을 함께했다.
몇 달이 지나 황제가 새벽에 활을 쏘러 나갔는데 조왕은 일찍 일어나지 못했다. 태후는 그가 혼자 있는 것을 노려 사람을 시켜 독주를 들고 가 그에게 마시게 했다. 나중에 황제가 돌아왔을 때 조왕은 죽어 있었다.
태후는 마침내 척 부인의 손발을 자르고, 눈을 뽑고, 귀를 지지고, 말을 못 하게 만드는 약을 먹이고 지하 토굴에서 살게 하며 ‘인간돼지’라고 이름붙였다.
몇 달을 보내고 혜제를 불러 인간돼지를 보여주었다. 이를 본 황제는 무슨 일인지 묻고 그것이 척 부인임을 알게 되자 크게 통곡하며 이로 인해 병이 들어 해가 다 가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사람을 보내어 태후에게 청했다.
“이것은 인간이 할 일이 아닙니다. 신은 태후의 아들이 되어 끝끝내 천하를 다스리지 못하겠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날마다 술을 마시고 음란과 쾌락을 일삼으며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 7년 만에 붕어했다.
《한서》 〈외척전 상〉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시간을 표현하는 방법이 《사기》와 다르다는 점입니다. 혜제가 새벽에 활을 쏘러 간 사건을 소개할 때, 《사기》에서는 ‘효혜제 원년 12월’이라는 절대적인 시점을 사용했지만 《한서》에서는 ‘몇 달이 지나’라는 상대적인 시간의 경과를 나타냈습니다. 이것이 본기와 열전의 차이입니다.
후궁에서 벌어진 은밀한 이야기
《한서》 〈외척전〉의 인간돼지 사건 서술은 우선 《사기》와 나왔던 뜬금없는 내용이 빠져서 일관성이 확보됩니다. 또한 《사기》 〈여태후본기〉에 없던 척 부인의 노래가 나옵니다. 이 노래는 여 태후의 분노를 키우고, 척 부인이 감금된 사건과 조왕이 소환되는 사건을 이어줍니다. 그리고 조왕을 독살한 여 태후는 여세를 몰아 척 부인을 곧바로 인간돼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조왕 독살 사건과 인간돼지 사건 사이의 시간차는 생략되고 급격하게 절정으로 진행되는 것입니다. 여러모로 《한서》 버전은 《사기》 버전에 비해 응집력 있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마무리
지금까지 《사기》 〈여태후본기〉와 《한서》 〈외척전〉에서 여 태후와 척 부인의 인간돼지 사건을 각기 어떻게 서술했는지를 간략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사기》 버전이 시간 순서에 따른 연대기라면, 《한서》 버전은 사건의 흐름을 전달하는 이야기입니다. 《한서》의 독자는 이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에 집중해서 읽으며 생생한 묘사에 전율할 수 있는 반면, 《사기》의 독자는 예상치 못한 서술 방식과 사건 전개에 충격을 받게 됩니다. 현대한국어를 사용하는 독자는 인간돼지 이야기를 접할 때 《사기》 〈여태후본기〉로 시작하는 경우가 드물 테니까, 이런 충격을 느끼기는 어렵겠지요.
2017-09-08 1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