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이야기를 합니다.

“주색“ 넘치는 향연

“주색“ 넘치는 향연

주아
주아 《한서》 파는 사람

🙋 질문

양부전을 보면, 조홍이 잔치 자리에 무희들을 불러 선정적인 춤을 추게 하자 양부가 ‘남녀가 유별한데 이런 건 부적절하다’라고 대놓고 지적한 일이 그의 강직한 성품을 반영하는 일화로 언급되어 있습니다. 후한까지만 해도 드물었지만 현대엔 동양풍 하면 쉽게 떠올리는 ‘기녀들이 술시중 드는 잔치’ 문화가 실제로 생겨나는 데에 조조와 조홍 등의 행태가 기여했을 가능성이 있을까요?

💁 답변

우선 “기녀들이 술시중 드는 잔치”라고 하면, 대체로 기녀들이 평소에 관청이나 민간의 기방에 소속되어 있다가 연회가 생기면 불려 가서 흥을 돋우고 손님들의 시중을 드는 장면을 상상할 것 같습니다. 이런 형태라면 중국에서 대략 당·송 이후에 가능한 모습입니다. 적어도 위진 시대까지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기루가 역사책에 좀처럼 드러나지 않습니다. 이 시기에 기녀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기녀들이 부자의 사유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기녀들의 술 시중을 받기 위해서는 부유한 권력자 본인이 되거나 부유한 권력자가 여는 연회에 손님으로 초대받거나 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한나라에서 “주색”을 함께 즐기는 것이 사회 풍조를 이룰 만큼 퍼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고 한 것입니다.

여성을 대동하여 음주, 가무를 즐기는 것이 한대 전구성원에게 하나의 사회 풍조를 이루었는지는 확언하기 어렵다. 이런 점은 위진 시대의 주색과 다른 점이라 여겨진다.

이수덕. (2005). 〈漢代 酒의 實像:술의 이용과 양조〉. 《중국사연구》 34, 7.

사가에 속한 기녀들은 오늘날 가기로 분류됩니다. “가기”라는 말은 당나라 이후에 나오지만, 이전 시대의 경우 , , , 여악 등 명칭이 다양하므로 여기에서는 편의상 모두 가기로 쓰겠습니다. 가기의 존재 자체는 대체로 전국 시대부터 확인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사기》 〈여불위열전〉에서 여불위가 진나라 공자 자초에게 바친 조희는 여불위의 가기로 볼 수 있습니다.

한나라로 오면 가기에 관한 기록이 많아집니다. 《한서》 〈외척전〉에는 자산을 가진 개인이 가난한 집 여자아이들을 모아 춤과 노래를 가르치는 사업을 벌이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업의 목적은 기방을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여자아이들을 권세가에 가기로 팔아넘기는 데 있었습니다. 〈외척전-사황손왕부인전〉의 주인공 왕옹수는 이렇게 태자궁의 가기로 팔려갔다가 황손의 총애를 받아 아기를 낳고 얼마 못 가 황태자의 반란에 연루되어 죽었습니다. 또, 《한서》 〈원후전〉에서는 효원태후 왕정군의 다섯 동생들이 외척으로서 부귀영화를 누리며 서로 뛰어난 가기를 확보하기 위해 경쟁을 벌였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후한 말에는 가기 소유가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후한서》 〈중장통전〉에서 중장통은 부호들과 상인들까지 가기를 대규모로 보유하고 있는 사치를 비판했지만, 〈마융전〉에서 마융은 고명한 학자였음에도 사치를 부리고 음악을 좋아해서 제자와 만날 때조차 가기를 배치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삼국지》 위지25 〈양부전〉을 봅시다. 조홍은 하변 전투에서 승리한 기념으로 연회를 벌이고는 여창들에게 속이 비치는 옷을 입고 북 위에서 춤을 추게 했습니다. 정황상 이 “여창” 역시 조홍의 가기들이었을 것입니다. 알려진 것처럼 조홍은 엄청난 부자였고 또 조조의 지친으로 권세를 누렸습니다. 가기의 소유가 확대된 시대에 조홍이 가기를 더 자극적인 방식으로 활용함으로써 자기의 부귀를 과시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요?

이렇게 가기를 활용한 사치 경쟁은 서진 시대에 더욱 심해졌습니다. 《진서》 〈왕돈전〉에서, 당시 석숭과 함께 부를 다투던 왕개는 술자리에서 가기가 피리를 불다가 음을 하나라도 틀리면 바로 죽여 버렸습니다. 며칠 뒤 왕개는 또 연회를 열어서 미인들에게 술을 따르게 하고, 손님이 술잔을 비우지 않으면 담당 미인의 목을 베었습니다. 《세설신어》 〈태치〉에 따르면 왕개가 아닌 석숭의 일화라고도 합니다. 손님 중에서 왕도는 억지로 술을 마셨지만, 왕돈은 오히려 일부러 술을 안 마시고 미인 세 명의 목이 잘리도록 내버려 두었습니다. 주인인 왕개는 가기의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자기의 부를 과시했고, 손님인 왕돈은 그 모습에 꿈쩍도 않는 것으로 자기의 위엄을 과시한 것입니다. 당시의 일반인들은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기녀에 대한 일반인의 접근성(?!)이 높아진 것은 아마도 당나라 때 교방이 생기고 민기가 활발해지면서 비롯된 현상이 아닌가 합니다.


이 게시물은 《창작자와 오타쿠를 위한 삼국지 100문 100답》에 응모된 질문에 대한 답변 예시로 작성했습니다. 평소에 삼국지 썰을 풀다가 궁금하셨던 점이 있으면 아래 링크를 참고하여 질문을 남겨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