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명예롭게 은퇴할 자격이 있다
21세기 한국어로 글을 쓰는 사람들, 특히 페미니즘을 지지하는 이들은 3인칭 대명사로 여성을 가리킬 때 ‘그녀’를 피하고 모든 성별을 ‘그’로 통일해서 쓰거나 대명사를 아예 안 쓰는 경우가 많다. 나도 그렇다.
또한 ‘그녀’를 안 쓰는 사람들은 ‘그녀’가 유럽어의 여성대명사(를 수입한 일본어의 彼女)를 번역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므로 애초에 불필요한 말이고 부자연스러운 한국어라는 주장에 동의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그렇지 않다.
물론 ‘그녀’라는 대명사는 20세기 이전에 한국어에 없었다. 중국어와 일본어도 3인칭 여성대명사를 따로 가지지 않았다. 근대 이후 ‘그녀’, ‘她’, ‘彼女’가 생겨난 데 유럽어 여성대명사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나는 ‘그녀’가 잘못 만들어진 말이었다는 주장에 회의적이고 세 가지 질문이 있다.
- 동아시아의 언어 전통은 원래 성별중립적이었는데 “근대화” 과정에서 유럽어 여성대명사가 수입되면서 성별을 인위적으로 구별하게 된 것일까?
- 그렇다면 동아시아의 언중은 과연 여성을 따로 일컫는 말의 필요를 전혀 못 느꼈는데도 순전히 서구 문물을 받아들이느라 억지로 부자연스러운 단어를 만들어냈을까?
- 더 나아가서 여성대명사를 만든 효과는 과연 여성을 유표적인(marked: 전형적인 속성이 아니라서 공공연히 표시해 주어야 하는) 위치에 고착시키는 것뿐이었을까?
나는 이 세 가지 질문에 모두 부정적인 답을 내고자 한다.
1. 동아시아 언어 전통의 성별중립성
우선 동아시아 전통에서 공유하는 한문 어휘는 유럽어보다 성별중립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가령 영어의 ‘man’은 인간으로도 쓰일 수 있고 남자로도 쓰일 수 있지만, 한자 ‘人’의 사전적 정의에는 남자라는 뜻이 없고 여자 또한 ‘人’에 포함될 수 있었다. ‘王’과 ‘皇帝’도 단어 자체에는 남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영어처럼 king-queen, emperor-empress를 구별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실제로 어떻게 쓰였는지를 살펴보면 기본적으로 남성을 표준으로 놓고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예컨대 《논어》에서 공자는 주 무왕의 훌륭한 신하 10人을 논하면서 “부인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9人일 뿐”이라고 정정했다. 또 공자가 “여자와 소인은 가까이하기 어렵다”고 말했을 때 여자는 군자는커녕 小人에도 못 끼었다. 또한 수천 년 전 상나라 갑골문에서 강족 일반 또는 남성은 ‘羌’으로 표기했지만 강족 여성은 부수를 女로 바꾼 ‘姜’으로 표기했다.1 결국 人으로서 여성의 위치는 남성만큼 공고하지 못했고, 언제든지 人의 바깥으로 밀려날 수 있었다. 사전적 의미야 어쨌건 용례를 살펴보면 한자 ‘人’의 작동 방식은 영어 ‘man’과 상당히 유사한 측면이 존재했다. 즉, 한문의 성별 “중립적” 표현은 모든 성별을 평등하게 포괄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이외의 성별을 배제함으로서 성립한 셈이다.
2. ‘그녀’의 필요성
다음으로 한국어에서 ‘그녀’가 생겨난 배경을 알아보자. 알려져 있듯이 한국어에서는 ‘그녀’뿐만 아니라 ‘그’도, 다시 말해 3인칭 대명사 자체가 “수입”되었다. 여기에서 생겨난 오해는 남성대명사 ‘그’와 여성대명사 ‘그녀’(혹은 ‘그미’ 등) 두 단어가 동시에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례로 김기진은 외국 시를 번역할 때 ‘he’와 ‘she’ 두 단어를 모두 ‘그’로 옮겼다.2 이렇게 ‘he/she’의 번역과 ‘그/녀’의 분화 사이에 시간차가 있으므로, ‘그녀’의 등장에는 ‘she’의 번역어를 확보한다는 것 이외에도 또 다른 동인이 존재할 여지가 있다.
陳佩甄·이성주(2022)의 연구에 따르면 동아시아에서 여성대명사는 여성 담론과 함께 출현했다. 여성 집단을 호출하고 여성의 권리를 논하기 위해 여성을 지칭할 언어가 필요해진 것이다. 여자 개개인의 이야기는 ‘她’와 같은 여성대명사를 통해 보편적인 여성의 의제로 확장될 수 있게 되었다. ‘그’라는 단어로는 여성 고유의 경험을 집단의 것으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3. ‘그녀’의 효과
결국 기존의 성별중립적 표현만으로는 그 안에서 여성이 겪는 문제를 폭로하지 못했다. 일단 이런 폭로가 있었기 때문에 젠더 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어 오늘날 성별중립적인 표현의 필요성을 새롭게 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성을 ‘그녀’로 독립시키면서 ‘그’라는 보편적·중립적 단어가 사실상 남성만을 가리키게 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지만, ‘그녀’라는 말이 여성의 존재와 경험을 가시화하는 데 쓰였다는 역사는 부정할 수 없다. 21세기에 ‘그녀’가 여성의 유표성과 성별이분법을 강화하는 낡은 표현일 수는 있으나, 처음부터 한국어에 존재하지 않았어야 할 말은 결코 아니다. ‘그녀’는 명예롭게 은퇴할 자격이 있다.
언어에서 가부장적 패러다임을 개정하려는 전략으로는 여성 표지를 제거하여 유표성(→비표준성)을 폐기하는 “중성화”와 여성 표지를 적극적으로 사용하여 가시성을 증대시키는 “여성화” 두 가지가 있다.3 뻔한 말이지만 상황에 따라 여성화가 필요할 때가 있고 중성화가 필요할 때가 있다. 21세기 현재는 여성이 쉽게 타자화되고 물화되는 문제 때문에 여성화의 위험이 당장 더 커 보인다. 그러나 중성화가 언제나 이상적인 대안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도리어 여성의 존재를 은폐하는 데 쓰일 수 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