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역과 번역이 모두 ‘역’으로 끝나는 까닭
역(譯)의 의미 확장
0. 통역과 번역, interpret와 translate
한국어를 비롯한 한자문화권에서 통역(通譯)과 번역(飜譯)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단어이지만, 역(譯)이라는 한자를 공유합니다. 두 작업 모두 이 언어를 저 언어로 옮기는 과정을 포함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유럽어에서는 ‘통역’이라는 말과 ‘번역’이라는 말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영어로 통역에 해당하는 동사는 ‘interpret’, 번역에 해당하는 동사는 ‘translate’입니다. 두 단어 사이에 겹치는 요소가 없습니다.
영어 단어 ‘interpret’(통역하다)와 ‘translate’(번역하다)를 자세히 살펴보면, 접두사가 ‘inter-’와 ‘trans-’로 서로 다릅니다. 두 접두사 모두 라틴어에서 나온 말로, 대략 ‘inter-’는 둘 이상의 사람이나 사물 사이를 의미하고 ‘trans-’는 한 쪽에서 다른 쪽으로 건너간다는 의미입니다. 즉, 통역은 쌍방향이지만 번역은 단방향입니다. 실제로 통역에서는 한국어를 영어로 옮기는 작업과 영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이 번갈아 가면서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반면 한-영 번역과 영-한 번역은 별개의 영역으로 각기 전문가가 있습니다.
물론 한자문화권에서 이런 차이를 인지하지 못해서 역(譯)이라는 말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통역’과 ‘번역’을 찾아봅시다.
- 통역: 말이 통하지 아니하는 사람 사이에서 뜻이 통하도록 말을 옮겨 줌.
- 번역: 어떤 언어로 된 글을 다른 언어의 글로 옮김.
이렇게 뜻풀이를 보면 통역의 상호성(‘사람 사이에서’)과 번역의 방향성(‘다른 언어의 글로’)을 모두 포착하고 있습니다. 다만 방향의 차이보다는 언어를 옮긴다는 공통점을 더 중시한 것입니다.
이 공통점을 역(譯)이라는 한자로 표시하게 된 것은 중국 한나라 시기의 일입니다.
Chinese Text Project에서 선진 시기와 한나라 문헌을 통틀어 譯(역)을 검색한 결과를 살펴보면 총 133건이 나오는데, 《시경》, 《서경》, 《역경》, 《춘추》와 같은 고전에는 전혀 출현하지 않았습니다. 《논어》에도 나오지 않습니다. 시기를 아주 이르게 잡아도 전국시대에 몇 건이 존재할 뿐 대부분의 용례가 한대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1. 譯(역)의 “원래” 의미
주목할 점은 譯(역)이라는 말이 처음부터 interpret나 translate에 완전히 대응하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진한 시대 지식인들은 그렇게 믿었습니다. 이 사실은 《여씨춘추》와 《예기》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관을 쓰고 띠를 두르는 나라에서 배나 수레로 소통할 때는 상역적제를 쓰지 않고[凡冠帶之國,舟車之所通,不用象譯狄鞮] 《여씨춘추》 〈신세〉
먼저 《여씨춘추》에 따르면 중화에 속하는 나라들끼리 소통할 때는 ‘상역적제’(象譯狄鞮)를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상(象), 역(譯), 적제(狄鞮) 세 요소를 나열한 것입니다. 즉, 역이 단독으로 쓰이지 않고 상 및 적제와 함께 나왔습니다.
상과 적제의 정체는 《예기》에 나옵니다. 고대 중국에서 동서남북 사방의 “오랑캐”를 각기 다른 명칭으로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이 이야기의 출처가 바로 《예기》 〈왕제〉 편입니다. 〈왕제〉에서는 더 나아가서 민족의 명칭뿐만 아니라 통역관의 직책명도 방위에 따라 구별했습니다.
- 동쪽: 이(夷) / 기(寄)
- 남쪽: 만(蠻) / 상(象)
- 서쪽: 융(戎) / 적제(狄鞮)
- 북쪽: 적(狄) / 역(譯)
다시 말해 역(譯)은 원래 보편적인 통역이나 번역이 아니라 중국 북쪽의 외국과 소통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씨춘추》와 《예기》는 일반론이자 규범이므로 구체적인 상황에서 저렇게 사용했다는 증거가 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지식인들의 관념상으로는 지역에 따라 의사소통의 명칭이 달랐습니다.
2. 譯(역)의 의미 확장: 북방의 통역에서 일반적인 통역으로, 통역에서 번역으로
역(譯)은 이렇게 이론상 북방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사기》와 《한서》의 실제 용례를 보면 한 무제 이래로 서방과 소통할 때도 ‘적제’가 아닌 ‘역’을 썼고, 남방과 소통할 때도 ‘상’이 아닌 ‘역’이 쓰였습니다. 이렇게 된 까닭은 한나라 초기의 대외관계가 북쪽의 흉노 위주로 이루어져서 ‘역’의 역할이 커졌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합니다.1
이 변화는 후한 말의 사전 《설문해자》에서도 확실하게 나타납니다.
‘역’이란 사방 오랑캐의 말을 전하는 자다. [譯:傳譯四夷之言者。] 《설문해자》 권4 〈언부〉
앞선 《여씨춘추》나 《예기》와 달리 《설문해자》에서 ‘역’은 북쪽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오랑캐’의 말을 전달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읽는 ‘오랑캐’가 기분이 나쁩니다. 아무튼 이 경우 ‘역’은 문자로 적힌 글을 옮기는 번역이라기보다 중국어와 외국어 사이에서 말을 옮기는 통역이었을 것입니다.
‘역’이 번역의 의미로 쓰인 사례는 불경을 중국어로 옮기게 된 이후부터 찾을 수 있습니다. 불경의 번역은 후한 때 시작되었는데, 이때는 아직 번역 작업을 ‘역’이라고 칭했다는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 없습니다. 《전상고삼대진한삼국육조문》에서 검색해 보면 삼국 시대 오나라에서 활동한 승려들의 글이 가장 이른 용례인 것 같습니다. 지겸의 《법구경》 서문, 강승회의 《법경경》 서문 등에서 ‘역’이라는 말이 나타납니다.
3. 요약
한자문화권에서 역(譯)은 원래 중국에서 북방과 소통하는 관리를 가리키는 고유명사에 가까웠지만, 전한 초 북방의 흉노와의 관계가 중요해지면서 통역 전반의 의미로 일반화되었고, 후한 말 불경을 중국어로 옮기게 된 후 번역의 의미가 더해졌습니다.
참고 문헌
-
이종철. (2008). 《중국 불경의 탄생: 인도 불경의 번역과 두 문화의 만남》. 창비, 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