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이야기를 합니다.

소망지의 생애

소망지의 생애

주아
주아 《한서》 파는 사람

소망지는 전한 왕조 선제–원제 시기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정치가입니다.

1. 초년

소망지는 원래 대대로 밭일을 업으로 삼던 농민 출신이었는데,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서 《시경》을 배우고 당시의 최고 엘리트 교육기관이었던 태학에 선발되어 태학에서도 뛰어난 실력으로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때 황제는 무제의 막내아들인 소제로 나이가 어렸고, 대장군 곽광이 정권을 잡고 전권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소망지는 동료 왕중옹을 비롯한 유생들과 함께 곽광에게 추천되어 출세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런데 곽광은 정적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외부인을 극도로 의심하고 경계하게 되어, 방문객이 곽광과 대면하기 위해서는 옷을 벗고 몸수색을 받은 뒤 곽광의 수하들에게 양쪽 겨드랑이를 붙잡힌 채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소망지는 이 굴욕적인 절차를 거부하며 수하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곽광을 비판하다가 쫓겨났습니다.

이때 함께 추천받은 왕중옹 등은 모두 오늘날의 장관급에 버금가는 광록대부라는 높은 관직을 얻었지만, 곽광에게 등용되지 못한 소망지는 태학에서 치르는 시험을 통해 궁정의 하급 시종관인 낭(郞)이 되고 궁 안에 있는 작은 건물의 문을 지키는 직책을 받았습니다.

어느날 왕중옹이 궁에서 의전을 빵빵하게 갖추고 지나가다가 소망지를 돌아보고 조롱했습니다.

“만만히 보이기 싫다더니 문지기가 됐네!”

소망지는 대답했습니다.

“각자 자기 뜻대로 사는 법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망지는 궁에서도 쫓겨나서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2. 중년

그사이에 조정에서는 황제가 바뀌었습니다. 소제가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중략) 곽광은 어렸을 때 반란에 연루되어 황족의 지위를 잃고 민간에서 자라던 선제를 황제로 옹립했습니다. 곽광의 부인은 황후를 독살했고 곽광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삼아 곽광의 일족이 권력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 와중에 곽광에게 은밀하게 반대하는 대신이 소망지를 중앙의 낮은 직급으로 불러왔고, 곽광이 죽은 뒤 소망지는 황제에게 몰래 글을 올려 곽씨들의 권력을 해체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선제는 민간에 있을 때부터 소망지의 소문을 듣고 알았기 때문에 그의 벼슬을 여러 번 올려 주었고, 곽씨를 멸족한 뒤에는 더욱 중용해서 1년 사이에 장관급 직책에 이르렀습니다.

소망지는 오늘날의 외교부장관에 해당하는 대홍려라는 벼슬에 있으면서 흉노, 서역 등 외국과 관련된 정책의 방향에 대해 중요한 의견을 많이 내었고(EBS 동아시아사 수능특강에도 나온 적이 있습니다), 어사대부로 승진했습니다. 어사대부는 승상에 버금가는 직책으로, 현직 승상이 죽거나 물러나면 어사대부가 그 뒤를 이어 새로운 승상이 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당시 승상은 예전에 소망지를 곽광에게 추천했던 병길이었는데, 그래서였는지 소망지는 어사대부 자리에 있으면서 여러 차례 승상과 불화했습니다. 결국 그는 승상에게 무례했다는 이유로 어사대부 자리에서 쫓겨나고, 태자의 스승인 태자태부로 좌천되어 승상 테크를 타는 데 실패했습니다.

그럼에도 선제는 소망지를 여전히 신임했습니다. 당대 최고의 유학자였던 그는 중국 최초로 황제가 주최한 유학 학술 대회인 석거각회의를 주관하여, 유교 경전에 관한 여러 갈래의 학설을 정비했습니다. 또한 비슷한 시기 소망지는 그때까지 한나라의 대외관계에서 가장 큰 적이었던 흉노가 화친을 청하고 흉노의 군주인 선우가 한나라를 방문하게 만드는 일에 공을 세웠습니다. 이 일을 기념하여 선제는 곽광을 필두로 자기의 치세에서 공이 가장 큰 신하 11명을 골라서 초상화를 그렸는데, 11명 중 10명은 이미 죽고 없는 노신들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소망지였습니다. 당시의 조정에는 새 승상과 어사대부를 비롯해서 쟁쟁한 대신들이 있었지만, 그들을 다 제치고 태자태부였던 소망지가 살아있는 인물로는 유일하게 뽑혔습니다. 소망지를 비롯한 11명의 초상화는 대대로 황궁의 기린각에 걸려 있다가 왕망 시기 반란군이 궁에 불을 지르면서 소실되었습니다.

3. 말년

젊은 시절 탁고대신 곽광에게 쫓겨났던 소망지는 말년에 자신이 탁고대신이 됩니다. 선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태자를 보좌할 신하로 소망지를 지명한 것입니다. 소망지는 새 황제 원제의 스승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유학자들을 등용하고자 했지만, 이 과정에서 외척 및 환관과 틈이 생겨 정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외척들의 비리를 비판하다가 설화를 입었고, 갓 즉위하여 정무에 익숙하지 않았던 원제는 실수로 소망지를 파면시켜 버렸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제는 소망지를 다시 등용하고 승상으로 임명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소망지의 아들이 이전에 소망지가 파면된 일이 억울했다고 호소하고 나서면서 오히려 역풍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이전 일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 대신의 체통에 맞지 않다고 여겨졌고(억울해도 그냥 당하는 것이 대신의 미덕이었습니다), 말 한 마디를 잘못해서 불경죄로 처벌받는 시대였습니다.

환관들은 이 일을 빌미로 소망지의 자존심을 약간 꺾어 놓는 것이 그를 앞으로 덜 다치게 하는 길이라고 황제를 설득했습니다. 환관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황제가 소망지를 체포하도록 사람을 보내자, 소망지는 감옥에 가느니 죽는 것이 낫겠다고 자살하려고 했습니다(전한 시대에는 그런 풍조가 있었습니다). 소망지의 부인은 그것이 황제의 뜻이 아니라고 반대했지만, 소망지의 제자가 강직하게 자살을 권유하여 결국 소망지는 독약을 먹고 죽었습니다.

황제는 그제서야 속았다는 것을 깨닫고 비통해하며 매년 그의 제사에 사람을 보냈습니다.

4. 후대의 일화

4.1. 순욱의 롤모델?

소망지의 자(字)는 장천(長倩)입니다. 전한 시대에도 흔한 자가 아니었지만 후한 이후로 가면 같은 자를 쓰는 사람을 더욱 찾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삼국지》에 예외적으로 이 자를 쓰는 인물이 단 한 명 나옵니다. 바로 순욱의 장남 순운입니다. 순운의 자는 당시 백·중·숙·계로 형제 서열을 표시한다거나, 이름과 뜻이 연관된 글자를 쓴다거나 하는 등 《삼국지》의 시대에 예측할 수 있는 속성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점에서 더욱 눈에 띕니다. 《한서》에서는 〈소하조참전〉(소하·조참), 〈장진왕주전〉(장량·진평·왕릉·주발) 등 대부분의 전기가 여러 인물을 함께 담고 있는데, 〈소망지전〉은 드물게 소망지의 단독 전기입니다. 후한 시기에 공인된 역사서인 《한서》의 위상을 생각하면 순욱이 소망지를 모르는 채로 우연히 장남에게 같은 자를 지어 주었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삼국지》에 나타난 순욱의 말하기 전략에 대해서는 아(雅)가 여러 곳에서 언급한 적이 있는데, 사서에서 윗사람에게 의견을 말할 때 ‘아무개가 몰래[竊] 생각하기로’ 같은 겸양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지만 순욱이 조조에게 말할 때는 이런 예를 전혀 찾을 수 없습니다. 순욱이 1인칭 주어를 안 쓰는 것은 무엇보다 순욱의 주장이 주관이 아닌 객관임을 드러내는 효과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200년 전 소망지가 먼저 사용한 전략이기도 합니다. 《한서팸플릿1: 자칭·호칭·지칭》 45면에서 소망지와 장창의 글쓰기 스타일을 비교한 적이 있는데, 여기서 지적한 내용은 《삼국지포켓북1: 호칭어 가이드》 108–109면에서 순욱과 곽가의 말하기 스타일을 비교하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순욱은 소망지처럼 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순욱이 “왕좌지재”라는 평가를 받은 것도 유명한데, 이것도 《한서》 〈소망지전〉에 적힌 평론이 “[황제를] 보좌할 능력을 가진, 근대에 사직을 지킨 신하”[有輔佐之能,近古社稷臣]였다는 점과 연장해 볼 수 있습니다. 여러 모로 순욱이 소망지를 모델로 삼았을 법하고, 장남의 자를 소망지에게서 따온 것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닌 듯합니다.

4.2. 억울하게 죽은 충신의 대명사

《삼국지》에서 모개는 억울하게 화를 입은 인물의 예로 소망지를 가장 먼저 언급했습니다.

4.3. 남조의 황족

남조 송-제-양-진 네 왕조 중 제나라와 양나라의 황족이 난릉 소씨인데, 이들은 모두 소망지의 후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