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이야기를 합니다.

한나라 황실의 비처녀 논란

한나라 황실의 비처녀 논란

생산력 vs. 처녀성

주아
주아 《한서》 파는 사람

‘처녀’ 선호는 본능이자 전통인가?

이 글의 제목은 ‘한나라 황실의 비처녀 논란’입니다. ‘한나라 황실’과 ‘비처녀 논란’의 조합이라니 가 써 놓고도 정말 어색합니다. (애초에 ‘처녀’라는 말부터 도대체 이게 뭔가 싶지요.) 하지만 서브컬처의 여성 캐릭터가 동정, 소위 ‘처녀’인지 아닌지를 가지고 논란씩이나 하는 남덕들이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리고 그런 남덕들은 남자가 동정인 여자를 선호하는 것이 남성의 자연스러운 본능이라고 주장하고 이 본능의 존재를 우주의 법칙처럼 받들기 마련이지요. 이런 남덕들에게 고대 중국 한나라를 상상해 보라고 한다면, 황제의 처첩을 처녀로 뽑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애초에 ‘비처녀 논란’ 자체가 성립할 수 없는 세계를 그릴 것입니다.

꼭 이 정도의 남덕이 아니더라도, ‘동양 전통’의 전형적인 모습을 조선 후기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현대한국인이라면 유부녀가 이혼하고 임금의 후궁이 되는 것을 불가능한 일로 여길 수 있습니다. 궁녀를 채용하는 데만 해도 앵무새 피로 처녀성을 검사하는 절차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만큼, 정식 후궁을 선발하는 과정에서는 더 철저한 검증이 있었으리라고 추측하는 것도 이상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검증은 과거로 갈수록 더욱 엄격했을 것이라고 유추하는 경우도 적지 않습니다.

한나라의 ‘비처녀’ 후궁, 효경황후 왕씨

그러나 중국 전한시대에는 혼인 이력이 있는 여성이 후궁에 들어가는 것이 제도적으로 금지되지 않았습니다. 원론적으로 가능했던 정도가 아니라, 실제 사례도 존재합니다. 바로 무제 유철의 어머니인 효경황후 왕씨입니다.

효경황후 왕씨는 처음에 김왕손이라는 남자와 결혼해서 딸을 낳았습니다. 왕씨의 어머니는 점을 보러 갔다가 딸이 귀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딸 왕씨를 강제로 이혼시켜서 태자궁에 넣었습니다. 왕씨는 황태자의 총애를 받아 딸을 낳았고, 황태자가 경제로 즉위한 뒤에는 아들 유철을 낳았습니다. 경제는 모두 열네 명의 아들을 두었고, 장남을 태자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왕씨는 경제의 누나 관도장공주와 결탁하고 계략을 써서 태자를 폐위시키고 자신이 황후가 되었습니다. 유철이 새로운 태자가 되는 과정에서 모친 왕씨의 재혼 이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민간인과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경우에도 황태자의 후궁이 되는 데 지장이 없었고, 심지어 황후와 황태후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습니다. 즉, ‘비처녀’가 문제될 것이 없었기 때문에 ‘비처녀 논란’ 또한 있을 수 없었습니다. 논란이 일어나는 것은 경제 시기로부터 120여 년이 지난 성제 시기의 일입니다.

성제 시기의 비처녀 논란

성제는 조비연·조합덕 자매의 남편으로 유명하지만, 즉위 초에는 황후 허씨와 첩여 반씨 두 사람을 각별히 총애했고 다른 여자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허 황후와 반 첩여가 낳은 아이들은 모두 일찍 죽었고, 성제는 당시에는 늦은 나이였던 이십대 후반이 되도록 자식을 두지 못했습니다. 성제의 외척 왕씨 일가는 위기를 느꼈습니다. 성제가 끝까지 후사를 보지 못해서 다음 황제 자리가 성제의 동생 정도왕에게 넘어간다면, 정도왕의 어머니인 부 소의에게 권력을 빼앗기게 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급해진 왕씨들은 성제가 허씨·반씨만 보지 말고 다른 여자들과 많은 관계를 맺어 어떻게든 자식을 두기를 바랐습니다. 왕씨의 후원을 받은 지식인들은 황제에게 글을 올려 당시에 빈번히 일어나던 자연재해의 원인이 총애받는 후궁의 지나친 사치에 있다고 주장하며, 허 황후와 반 첩여에 대한 애정을 거두고 새로운 후궁을 늘려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특히 곡영이라는 인물의 글이 노골적이었습니다.

곡영: 기존의 첩들에게 한 사람씩 빠짐없이 폐하를 모시게 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합니다. 시급히 아이를 낳을 수 있는 여자를 더 많이 들이셔야 합니다.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로 고르지 마시고, 이전에 아이를 낳아 보았다고 해서 피하지 마시고, 나이도 따지지 마십시오.1

《한서》 권85 〈곡영두업전

귀가 얇은 성제는 이 선전에 혹해서 새로운 후궁을 들였습니다. 그중에는 성제의 외삼촌 왕봉의 첩의 동생인 장씨도 있었습니다. 장씨가 재혼녀로 성제의 승은을 입자, 오늘날의 서울시장에 해당하는 경조윤 직책에 있던 왕장이 글을 올려 비처녀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왕장은 왕씨이지만 외척 왕씨와는 다른 가문입니다. 전한시대에 왕씨는 아주 흔한 성이었습니다.) 왕장은 비처녀의 존재에 격분했는지 그만 선을 넘고 말았습니다.

왕장: ·에서도 처음 낳은 아이를 죽여 ‘탕장’으로 혈통을 바로잡는 마당에, 하물며 천자께서 이미 출가한 이력이 있는 여자를 가까이 하시다니요!2

《한서》 권98 〈원후전

왕장이 주장한 탕장이란, 아내가 시집와서 처음 낳은 아이는 씨가 다를 수도 있다는 이유로 죽여 버리는 풍습입니다. 이런 풍습이 정말로 존재했는지, 아니면 왕장의 망상이었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쨌든 영아살해를 본보기로 삼자는 것은 오늘날에도 공적인 자리에서 말하기에는 과격한 주장입니다. 이로 인해 왕장은 황제를 오랑캐에 비기고 감히 해서는 안 되는 말을 했다는 이유로 대역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서 죽었습니다. 전한시대의 비처녀 논란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났습니다.

처녀 선호라는 신화

결국 전한시대에는 황제의 여자가 처녀라야 한다는 규범이 작동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런 규범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었지만, 여러 가능한 의견 중 하나일 뿐이었고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처녀 선호는 남성의 본능이자 뿌리깊은 전통이 아니라, 전한시대 이후 인위적으로 제도화된 규범입니다.


원문

  1. 使列妾得人人更進,猶尚未足也,急復益納宜子婦人,毋擇好醜,毋避嘗字,毋論年齒。 

  2. 且羌胡尚殺首子以盪腸正世,况於天子而近已出之女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