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건적’ 말고 그냥 ‘황건’이라고 말해 보기
20년 전 아(雅)의 본체가 대학에서 교양수업을 들을 때의 일입니다. 정확한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토론 중에 대략 누구나 인정하는 절대악의 예시로 “황건적”을 거론한 수강생이 있었습니다. 그때 “황건적이 무조건 나쁘다는 것도 낡은 관점이다, 중국에서는 ‘황건기의’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하고 반박했던 기억이 납니다. 삼국지를 잘 알던 때가 아니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이미 삼국지 덕후의 자질이 잠재했던 것 같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한국어로 “황건”이라는 두 글자를 단독으로 사용하는 것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머릿속에서 “황건적”이라고 자동완성해 버리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니 원문에 “黃巾”이라고만 되어 있어도 다들 “황건적”이라고 번역해 버립니다. 아(雅)가 지금 맥OS에서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데, “황건”이라고만 치고 한자 변환을 시도하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지만 “황건적”이라고 치면 “黃巾賊” 변환이 가능합니다. 그만큼 “황건적”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에서 황건 집단에 대한 판단을 내리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과연 《삼국지》나 《삼국연의》 원문에서도 이렇게 매번 “황건적”이라고 “적”을 붙여 말할까요? 궁금해져서 Chinese Text Project (https://ctext.org)에서 원문을 검색해 보니 의외의 결과가 나왔습니다. 우선 《삼국지》에서는 “黃巾” 74회 중 9회만이 “黃巾賊”으로 쓰였고(12.2%), 《삼국연의》에서는 “黃巾” 47회 중 4회만이 “黃巾賊”이었습니다(8.5%). 즉, “황건”이라는 말을 쓸 때 그 중에서 10% 전후만이 “황건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황건”에 “적”을 붙이지 않았다고 해서 황건을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으로 보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한국어에서처럼 매번 “황건적”으로 자동완성할 정도는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한서》의 경우 “황건적” 함유량이 조금 더 높습니다. “黃巾” 105회 중 30회가 “黃巾賊”입니다(28.6%). 후한 황실의 입장에서는 황건 집단을 일방적인 도적·역적으로 규정할 것입니다. 그런데 후한 왕조의 신민이 아니라 현대 대한민국의 시민인 우리가 이 관점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할 필요가 있을까요? 혹시 진심으로 “황건적”을 무조건적인 악으로 규정하고 토벌할 대상으로 여긴다면, “사측이세요?” 하고 묻고 싶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