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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복숭아나무 소담하고

— 건안8년 여름 5월, 허도에서.

접시를 덮은 천을 진궁이 걷어내자 반듯하게 잘린 복숭아 여덟 조각이 향을 뿜었다.1 ❡ “분수에 안 맞게 화려한 세팅이네요. 나한텐 그냥 안 썰고 껍질째로 던져 주시면 되는데.”2 ❡ 조조는 진궁이 예법을 들먹이는 것을 못 들은 척하고 말을 돌렸다. ❡ “먹기 전에 잠깐만. 복숭아 하면 떠오르는 시 없어?” ❡ “또 서왕모 나오는 시 쓰셨어요?”3 ❡ “말고, 고전 중에서 찾아봐.” ❡ “시부詩賦 잘 몰라요.”4 ❡ 조조는 즐겁게 알려주었다. ❡ “경卿도 알 만한 거야.” ❡ 진궁은 경계하는 기색으로 물었다. ❡ “갑자기 무슨...

2-2. 상아

— 건안7년 가을 8월, 관도에서.

진궁은 대개 해가 지면 곧바로 침상에 누웠다. 책이라도 읽자고 방을 밝히기 위해서는 시자를 시켜 불을 가져오게 해야 했다. 일단 불을 켜면 시자는 등을 지키면서 떠나지 않았다. 몇 달 전에 고의로 화상을 입고 나서부터 특히 노골적으로 감시하는 것이 더욱 불편했다. 그냥 휘장을 치고 일찍 자는 편이 나았다. ❡ 조조가 대문을 열고 들어와서 방에 불을 켤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을 보면 잠이 꽤 깊게 들었던 모양이다. 이 인간이 하다 하다 못해 이제는 자는데 찾아와서 덮치려고까지 하나 싶어서 한숨이 나오는데 조조는 입을 활짝 벌...

2-1. 바질 향기

— 건안7년 여름 5월, 관도에서.

조조도 처음에는 진궁이 마루에 엎드려 화분에 몰두한 모습이 귀여워서 방해하지 않으려고 했다. 하지만 거의 1분1이 다 되도록 자기가 온 것을 알아차릴 기미가 없자 슬슬 심술이 났다. 조조는 손짓으로 시자를 불러서 몰래 지시를 내리고는 진궁을 불렀다. ❡ “공대.” ❡ 진궁은 그제야 조조의 존재를 깨닫고 몸을 일으켰다. ❡ “언제부터 와 계셨어요?” ❡ 조조는 섭섭함을 감추지 않았다. ❡ “그게 그렇게 좋은가 보지? 고孤가 온 줄도 모르고 말이야.” ❡ 진궁은 전혀 미안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 “나륵羅勒2을 처음 키워 봐서...

1-8. 선조에게 지내는 제사

— 건안7년 봄 정월, 허도에서.

조조는 새해에 치러야 할 공무와 사무를 다 치르고 마침내 진궁을 찾아가서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 “어느 쪽이야?” ❡ 진궁은 즉시 대답했다. ❡ “두 번째.” ❡ 조조는 말문이 막혔다. 진궁이 충분한 고민 끝에 첫 번째를 택할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진궁은 분명하게 말했다. ❡ “장문원을 불러서 내 목을 치라고 하세요.” ❡ 조조는 분노로 몸을 떨고 진궁을 노려보면서 간신히 말했다. ❡ “그래. 마침 지금 허도에 와 있으니까 얼마 안 걸릴 거야.” ❡ 진궁이 자기를 버리고 죽음을 선택하는 것을 막지 못한다면 그 죽음을 괴롭...

1-7. 욕심 많고 잔인한 사람

— 건안6년 가을 9월, 허도에서.

관도대전 후 한 해가 지나 가을이 다 끝날 무렵에야 허도로 돌아온 조조는 진궁을 찾아가자마자 불평부터 했다. ❡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다시는 순문약을 볼 생각도 하지 마.” ❡ 진궁은 태연했다. ❡ “당초에 볼 생각을 한 적도 없어요. 편지도 그쪽에서 보냈고, 여기도 그쪽에서 왔고, 그리고 다 공公이 허락한 일이잖아요.” ❡ “아무튼 둘이서 나 몰래 짠 건 맞잖아?” ❡ “우연히 목표가 맞아서 공公의 포로가 어떤 욕망을 갖고 있는지 보여드린 것뿐이에요. 공公이 참고하시라고요.” ❡ 고의가 분명한 비웃음을 지으며 덧붙...

1-6. 세 사람

— 건안6년 봄 3월, 허도에서.

진궁이 거처를 옮기는 절차는 신속하고 기계적이면서 굴욕적이었다. 짐을 쌀 것도 없었다. 간단한 몸수색1 후 얼굴이 천으로 가려진 채로2 업혀 가서 수레에 앉혀지고 등 뒤로 양손이 묶인다.3 수레의 사면을 막고 밖에서 봉인하고 나면 곧 출발한다. ❡ 가는 길에 평소에 못 듣던 소리를 듣는 것만은 즐겁다. 하나하나를 판별하기 어려운 웅성거림의 덩어리라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세운다. 이 즐거움은 대개 오래 못 간다. 성을 나가기도 전에 갑자기 사람들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때가 있다. 봉인된 수레의 정체가 거리에 알려졌기 때문일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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